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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공범자들’ 최승호 “지난 9년 MBC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기자정신 질식시켜”

▲최승호PD(사진=이시우 shu95@hanmail.net)

[푸드경제TV 정시우 칼럼니스트] 최승호는 MBC 간판 PD였다. 저널리즘의 대명사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잘렸다. 부패한 권력을 파헤치는데 너무 유능했다는 이유로, 정말 그 이유로 잘렸다. MBC는 그의 자리를 박탈하는 방법으로 언론인 생명을 끊으려 했으나 틀렸다. ‘뉴스타파’를 통해 날선 보도를 이어간 그는 <공범자들>이란 영화로 MBC에 폭탄을 투여했다. 최승호의 반격이다. <공범자들>은 이명박근혜 시절, ‘권력’이 언론을 어떤 식으로 장악하고 ‘하수인’들이 그런 권력에 어떻게 빌붙었는가를 스펙터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망가져 가는 언론환경 속에서 이에 저항한 ‘언론인’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다큐이기도 하다. MBC 블랙리스트 파문과 파업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러모로 때맞춰 당도한 영화가 확실하다. <공범자들> 홍보로 전국 팔도를 종횡무진 중인 최승호 감독을 지난 6일 목동 방송회관 피디협회에서 만났다. 이날은 최승호 감독이 MBC에서 해직된 지 1095일 되는 날이었다. MBC 파업이 본격화된 날이기도 했다.

Q. 아이돌 같은 일정을 소화하고 계십니다.

최승호: 해야 하니까요. 우리 후배들이 파업하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해서 많이 알려야죠. 다만 (스크린 확보가) 욕심만큼 안 되니까…아쉽죠.(웃음)

Q. 아침에 방송 시청률을 확인하는 것과 박스오피스를 보는 건 어떤가요.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최승호: 일단 박스오피스는 제가 아직 그 메커니즘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답답한 게 있어요. 시청률이야 딱 보면 알죠. 제가 예측한 것과 기대한 것의 차이가 표만 보면 바로 파악이 됩니다. 그리고 박스오피스는 한 번의 승부가 아니고 길게 이어 가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쌓이는 게 있어요.(웃음) 영화하는 분들, 견디는 거 보면 참 대단하다 싶어요. 특히 영화가 흥행 실패하는 경우 스트레스와 우울을 심하게 겪겠구나, 생각하죠.

Q. 그래서 영화하는 사람들은 우울을 겪지 않으려면 차기작을 바로 준비해야 한다고 해요.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거죠.

최승호: 맞아요. 방송은 주기가 짧으니 그런 부분에서 조금 유리하죠. 결정적으로 방송국에서는 제작비를 제가 내는 게 아니잖아요?(웃음) 시청률이 조금 떨어져도 그 책임을 함께 나눠지니까 부담이 조금 덜했던 것 같아요.

Q. 지난 8월 30일 MBC 상암 로비에서 열린 ‘부당전보 유배지 폐쇄 선언’에 참석하셨어요. 9월 4일에 열린 ‘서울지부 파업 출정식’에도 참여해서 발언하셨고요. 그날이 해직 1903일째 되던 날입니다. MBC 안에 다시 들어가 후배들 앞에 선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더군요.

최승호: 저보다 내부에 있는 후배들이 훨씬 고통스러운 5년을 보냈어요. 제 입장에서는 참 불쌍하기도 하고 많이 안타깝죠. 제가 생각하기에 지난 5년 동안 MBC는 ‘한국의 아우슈비츠’였어요. 김재철·안광한·김장겸(전 현직 사장)이 후배들을 가스실로 보내지는 않았지만, 기자 정신을 질식시켜 버리려고 온갖 시도를 다 했으니까요. 어쨌든 그 환경에서 견디고 살아남아 지금 이렇게 모인 거예요. 그래서 출정식 때 위로와 함께 축하를 해주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후배들 앞에 섰죠.

Q. 아우슈비츠 얘기를 하시니까 생각나는데, 박성제 MBC 해직 기자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김장겸 사장을 비롯, MBC에서 버티고 있는 소수 임원’에 대해 “마치 해방을 앞두고 친일파들이 발광하는 수준”이라고 했더군요. 비유에 무릎을 쳤습니다.

최승호: 그렇죠. 이명박근혜를 일제라 생각하면, 일제가 폐퇴한 후 남아있는 친일 부역 세력들이 저항하는 형국인 거죠, 지금.

Q. 사실, 2012년 170일 MBC 총파업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부적으로 상처가 더 컸을 테고요. 그 기억이 이번 파업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최승호: 그때는…진짜 힘들었어요. 6개월 이상 파업이 지속되면서 구성원들이 견디기 힘든 지점까지 갔죠. 마침 방송통신위원회라든지 박근혜 후보가 협상을 통해 MBC를 정상화 시키겠다 약속하니까, 그걸 거절하고 계속 파업을 해 나가는데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Q. 그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았죠.

최승호: 네. 그때 실패했던 경험이 이번 파업 돌입에 있어 어려움으로 작용했어요. 일단 지난 5년 동안 노동조합이 집단적인 싸움을 하기 힘들 정도의 상황이 됐어요. 싸우지 못하다 보니 또 여러 문제가 누적됐고요. 그러다가 언론인 정신이 질식할 정도의 상황에 이르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거죠. ‘촛불로 세상이 바뀌었는데, 우리도 우리 힘으로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 ‘이젠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각들을 한 거죠. 이게 마지막 싸움이죠, 마지막. 이번에도 실패했다? 더 이상 ‘다시 한번 도와주세요’라는 이야기는 못할 겁니다.

“마이크를 뺐긴 언론인”

Q. MBC 블랙리스트 파문과 이로 인한 제작거부 운동, 그리고 파업이 일어난 가운데, 여러모로 때맞춰 당도한 영화란 생각이 듭니다.

최승호: 운은 아닙니다. 파업까지 생각했기에 만든 거죠. 제가 노조위원장을 했었기에 노동조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동력을 잘 알아요. 이번엔 틀림없이 싸움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봤죠. 그랬을 때, 시민들에게 그 싸움이 너무 급작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너희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정권 바뀌었다고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기에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공범자들’을 만든 거죠.

Q. 목표를 정확하게 이룬 셈이군요. 망가져 가는 언론환경 속에서 이에 저항한 ‘언론인’들이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 것이 ‘공범자들’의 큰 성과니까요.

최승호: 그렇죠.

Q. 지금 MBC 파업을 향한 시민들의 지지가 뜨거운데요, 그러한 분위기 형성에 ‘공범자들’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나요.

최승호: 파업 구성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전엔 인터넷상에 ‘MBC’ 하면 ‘엠병신’이라고만 달렸대요. 그런데 최근엔 누가 그렇게 달면, 그 밑에 <‘공범자들’을 보세요. 그걸 보고 나서 이야기를 하세요>라는 댓글의 댓글이 달린대요. 많은 변화죠.

Q. 전국 곳곳을 다니며 관객들을 만나고 계시는데요, 인상적인 관객 반응이 있다면요.

최승호: 조금 분류해서 말씀드리면, 진보적인 분 중에는 “촛불집회 나가서 MBC를 질타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중도나 보수 쪽 분들은 “한국 언론이 이렇게 통제 당하는지 몰랐다. 이러면 안 되지” 하세요. 청소년들은 또 다른 면을 봐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잖아요? 그들은 이용마-김민식PD 같은 사람들이 삶을 결단해 나가는 모습 속에서, 자기 삶의 모델을 발견하는 것 같아요. 어떤 고등학생은 영화가 끝난 후 저에게 와서 “내가 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 알려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많은 피드백을 주세요.

Q. 이전 MBC PD 최승호를 바라보던 시선과, 영화감독 최승호를 바라보는 지금의 시선에 차이를 느끼시나요?

최승호: 제가 영화에 등장하는 출연자이기도 하잖아요?(웃음)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친근하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김민식PD 딸도 영화를 보고 저를 가리켜 그랬대요. “저 아저씨, 귀엽다”고.(일동 웃음) 답변 안 해 주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질문을 하는 제 모습이 좀 짠하고 재미있었나 봐요.

Q. 아나운서 조합원들이 ‘공범자들’ GV(관객과의 대화)를 열심히 돕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최승호: 손정은 아나운서가 GV에서 자신을 아나운서라고 소개하지 않고, “MBC 사회공헌실에서 일하는 손정은입니다”라고 소개해서 놀랐어요. 아나운서라는 명칭을 뺏긴 거죠. 그러면서 “방송을 안 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방송을 안 하면 못살 것 같더라”고 했어요. 그런 마음으로 6년 만에 대중들과 만나서 진행을 한 거죠. 신동진 아나운서도 얼마 전에 분당에서 ‘공범자들’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5년 만에 마이크를 잡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Q. 옆에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겠습니다.

최승호: 그럼요. 본인들도 오랜만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어요. 영화엔 소개되지 않은 (부당한) 일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요.

Q. 영화 개봉 전에 배현진 아나운서로 인해 홍보가 많이 됐어요. 그런데 정작 영화엔 안 나와서 아쉽다는 목소리들도 있습니다.(웃음)

최승호: 저희가 취재할 때까지만 해도 배현진이나 신동호 아나운서에 대한 이야기를 넣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영화가 완성된 후 두 사람에 대한 여러 이야기(배현진 양치 사건 등)들이 쏟아져 나왔죠. 사실 저희도 영화에 집어넣어 보려고 했어요. 뒤늦게 촬영도 하고 편집도 했죠. 그런데 그걸 넣으려면 심의를 다시 받아야 하더라고요. 심의가 나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Q. 개인적으로 MBC 홍보국에서 보내는 보도자료(파업을 비판하고 사장을 옹호하는)를 처리하는 언론들의 워딩이 바뀌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걸 ‘MBC 측 입장’이라고 처리하는 데 불만이 있어요. 그건 MBC 사장 측의 입장이지, 모두의 입장은 아니잖아요? 오해를 줄 수 있는 워딩인 만큼 언론들이 문제를 가져 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최승호: (고개 끄덕이며) 안광한이 정윤회 아들을 MBC에 꽂았다는 의혹이 나왔을 때도 ‘MBC 이름’으로 사실무근이라 했죠. 김장겸의 부당노동행위에도 역시 ‘MBC 이름’으로 아니라고 했고요. 늘 느껴온 문제입니다.

Q. 사실 저에게도 이번 파업이 유독 의미심장한 게, 제가 MBC 라디오 ‘세상을 여는 아침’에서 토요일 아침마다 영화를 소개해 주고 있었어요. 파업에 돌입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던 PD님-작가들-이재은 아나운서와 아쉽게도 만나지 못하고 있죠. MBC 소속인 PD와 이재은 아나운서의 고통 못지않게 작가들도 힘들겠다는 생각인데요, 프리랜서인 그들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생계가 완전히 끊긴 셈이니까요. 그럼에도 라디오 작가들이 모여서 파업 지지 성명을 발표했더라고요. 뭔가 뭉클한 지점도 있고,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최승호: 괴로움이라는 건 프리랜서 작가나 아나운서들도 못지않을 거예요.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만드는 게 그분들이니까요. 어떤 라디오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회사 쪽의 편향적 보도에 항의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그만뒀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하기 참 힘든데…마음들이 모이는 것 같아요. 싸움이 빨리 끝나길 바랍니다.

“세상을 조금씩 바꿔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보람느껴요.”

Q. 대학 때 연극반에서 살았다고요. 배우를 꿈꾸셨나요.

최승호: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도 했죠. 나름 잘나가는 배우였습니다.(웃음) 이창동 감독이 학교 선배셨는데, 직접 와서 분장도 해 주시곤 했어요. 프로극단에도 서면서 연극으로 한 번 먹고 살아볼까 했는데, 제 실력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먹고 살기 힘들겠더라고. 그래서 도망 왔죠. 방송으로.

Q. 1986년 MBC에 입사하셨습니다. 방송을 선택한 건 어떤 이유인가요.

최승호: 군대에 갔는데, 기자 시험을 준비하는 동기가 있었어요. 전 기자들이 시험 쳐서 들어가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리고 성적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 두 가지에 일단 끌렸고, 무엇보다 기자라는 직업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80학번이에요.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죠. 사실 지금보다 더 기레기라면 기레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인데, 그럼에도 약간이라도 행간의 진실을 담을 수 있는 여백을 몇몇 언론에서 발견했어요. 그런 의미를 가지고 기자 시험을 준비한 거죠. 그러다가 MBC 시험을 가장 먼저 치게 됐는데, 차마 MBC 기자로는 지원을 못 하겠더라고요. 당시 MBC가 완전 ‘땡전뉴스’(제5공화국 시절, 시계가 ‘땡’ 울리면 뉴스가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찬양하는)였잖아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MBC 기자로 들어가면 연극반 동료들에게 욕을 많이 먹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드라마 PD를 해 보자’가 된 거에요. MBC가 또 드라마가 강했으니까요. 그렇게 드라마 PD를 하겠다고 입사했는데, 들어가 보니 또 교양 PD가 솔깃하더라고요.(웃음)

Q. 1995년 ‘PD수첩’에 합류하기 전, 시사교양국 PD로 ‘경찰청 사람들’, ‘MBC스페셜’ 등 여러 프로그램을 거치셨죠. 무엇을 훈련하고 습득한 기간이었나요.

최승호: 연극을 했던 것이 스토리텔링을 잡는 데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긴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가는 방법에 익숙한 게 있었죠. ‘경찰청 사람들’이 드라마 기법을 차용한 재연 프로그램이잖아요. 사실상 드라마죠, 드라마.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별로 낯선 방식은 아니었던 거죠. 그때의 경험들이 또 지금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있고요.

Q 초등학생 때부터 대구에서 성장해 경북대학교 법대 행정학과에 입학했어요. 보수의 텃밭인 대구에서 자란 것은 감독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최승호: 연극반이 완전 운동권은 아니지만, 그런 느낌들이 있었어요. 주동은 안 해도 데모가 일어나면 열심히 참석하곤 했죠. 그때 굉장히 엄혹한 시대였는데 선배나 학생운동권 리더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뭐랄까…언제고 사회적으로 영향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MBC에 들어온 바로 다음 해에 노동조합이 생겼는데 노조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노동조합활동과 더불어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이 생긴 거고요. 사실 ‘PD수첩'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PD는 거의 없어요. 소송도 걸리고 취재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드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게 맞더라고요. 그걸 통해 세상을 조금씩 바꿔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어요.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죠.

“비관론자? 낙관론자!”

Q. 최승호라는 이름은 이제 ‘PD 저널리즘의 대명사’죠. ‘PD수첩’에서 <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 <줄기세포 신화의 진실> <검사와 스폰서> <4대강, 수심 6m의 비밀> 등을 보도,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해직 후 합류한 ‘뉴스타파’에서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원전 묵시록> <삼성 이건희 회장 성매매 동영상> 등을 보도하셨고요. 뭐랄까요. 위험인 줄 알지만, 위험하기에 끌리는 본능 같은 게 있으신 것 같아요.

최승호: 그런 게 있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사회악(惡)을 파헤치고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저를 비관론자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데 아니에요. 저는 항상 낙관적이고,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했고, 제가 하면 앞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며 달려온 사람이에요. 우리 사회는 늘 진보해왔다고도 믿었고요. 단, 이명박이 나오기 전까지 말입니다. 이명박이 등장하면서 ‘이거 우리가 너무 빨리 왔나? 왜 갑자기 뒤로 돌아가지?’(웃음) 라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에요.

Q. 내가 찾아낸 진실이 과연 진실인지 고민하며 밤잠을 설쳤던 때는 없었나요.

최승호: 많죠. ‘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 편을 준비할 때가 그런 순간이었죠. 황우석 팀이 줄기세포 11개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저희는 11개가 전부 가짜라는 것을 검증을 통해 알아냈죠. 그때 많은 시청자가 “10개는 거짓이라도 1개라도 만들었다면 기술력이 있는 거 아니냐. 그런데 너희들이 그걸 보도함으로써 국익을 완전히 망친 거 아니냐’며 항의를 많이 했어요. 만일 하나라도 진짜가 나오면 역풍을 맞을 수 있는 상황이었죠. ‘PD수첩’과 MBC는 박살 나고, 저는 사표를 내야 하는 분위기. 그런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 취재가 진실인가’ 하는 것에 대해 매일 밤 고민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또 확인했어요. 수백 번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에 시달린 건, 황우석 사건 때 일이지요.

Q. 그런 불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건요.

최승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사실이니까. 확인한 사실이기 때문이죠. 그 사실에 대해 대중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방송이 나간 후에 여론이 완전히 뒤집혔죠.

Q. 2008년 미국으로 유학, IRE(탐사보도협회)에서 1년간 탐사보도 공부를 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오른 유학길이었나요.

최승호: ‘PD수첩’에서 황우석 편이 방송되고, 방송 내용이 진실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이 저를 싫어하더라고요. 당시 제가 ‘PD수첩’ 진행자였는데 제가 화면에 나타나니까 시청자들이 싫어했어요. 그러다 보니 무슨 수를 써도 시청률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PD수첩을 떠나, 다른 프로그램 책임PD로 갔어요. 이후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 됐어요. 당선되자마자 저를 보직에서 물러나게 하더라고요. 인사철도 아닌데 갑작스럽게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구나’, 느꼈죠. 그런 일을 겪으면서 뭔가 인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부를 선택한 거죠.

Q. 어떤 걸 배우셨나요.

최승호: 해외 탐사보도가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가를 폭넓게 볼 수 있었죠. 저널리즘의 정신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고요. 돌아온 후 ‘PD수첩’ 현장PD로 다시 취재를 시작했어요. 저는 방송을 할 때 의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다음에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죠.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의미 있는 것의 공통분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아왔어요. 그걸 늘 해 왔어요.

“영화, 저널리즘의 유용한 수단”

Q. 2012년 7월, MBC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됐습니다.(파업 등에 참여한 이유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못하는 상황에 놓인 셈인데요.

최승호: 그래서 영화라는 돌파구를 찾은 거죠. 처음엔 ‘뉴스타파’에 합류해서 인터넷 방송을 활용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자백 이야기’도 만들고, ‘거짓말 탐지기를 속인 여자’라는 다큐도 후속으로 내보내면서 여러 형식적인 실험을 했어요. 굉장히 의미 있는 실험이긴 했으나, 인터넷 뷰가 10만 정도 나오는 수준이었어요. 그것으로는 궁극적으로 국정원을 바꾸지 못하더라고요.

Q. 인터넷 방송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있었겠죠.

최승호: 네. 임팩트 면에서의 한계를 느꼈죠. 그래서 ‘영화라는 걸 한 번 해보자’가 된 거고, ‘자백’을 만든 거예요. ‘자백’을 통해 영화가 우리 시대 저널리즘의 유용한 수단이라는 걸 확실히 느꼈어요. 그래서 또 이번 ‘공범자들’도 만들게 됐는데 이번에도 다시금 그 힘을 느끼고 있습니다.

Q. MBC가 정상화되는 날, 돌아가서 무너진 MBC를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더군요. 감독 최승호의 영화는 다시 못 보는 건가요.

최승호: 영화, 해야죠. MBC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오래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일단 정년도 얼마 안 남았고.(웃음) 내 역할이 끝났다 싶으면 다시 ‘뉴스타파’로 돌아와서 영화도 만들고, 내 쓰임을 다시 찾지 않을까 싶어요.

Q. 기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뜨거워지는 말이네요. 사실 현장에서 뛰는 능력 있는 나이 든 선배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현장이 아닌 사무실을 지키는 수순으로 가는 게 지금의 언론환경이잖아요?

최승호: 그런 게 필요해요. 한국 언론인들은 문제 중 하나는 조로(早老)예요. 나이가 조금만 들면 책상에 앉아서 후배들 기사를 보며 하루를 보내죠. 노 기자들에 대한 시선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저널리즘의 정신’의 기본은 무엇인가요.

최승호: ‘최선의 진실을 발견해 내는 것’ 탐사보도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글. 정시우 칼럼니스트 siwoorain@hanmail.net, 사진. 이시우 shu95@hanmail.net